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(문단 편집) == 과정 == 1945년 6월 [[정치깡패]] [[박춘금]]이 '대의당'을 조직하여 당수에 취임했고 [[7월 24일]] 경성 부민관에서 대의당 주최로 '아시아 민족 분격대회'를 대대적으로 열었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이 막바지에 이르러 승기는 거의 [[연합군]]으로 넘어갔지만 [[친일반민족행위자]]들이 눈앞으로 다가온 [[일본 제국]]의 패배를 부인하고 국민들을 선동하여 전쟁터로 몰아넣을 심산으로 개최한 행사였다. 이날 행사에는 조선 [[총독]] [[아베 노부유키]],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(板垣征四郎)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[[장성급 장교|장성]], [[친일반민족행위자]]들이 다수 참석했으며 [[일본 제국]]의 괴뢰 정권인 난징정부와 [[만주국]]의 대표 등도 연사로 참여했다. 이때 유만수, 강윤국, [[조문기]]는 서울 관수동의 유지사 집에서 독립결사체인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하고 연장자인 유지사를 의장에 추대했다. 세 지사는 이와 함께 친일 거두들이 참석하는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무산시킬 것도 결의했다. 이를 위해 유지사는 서울 수색변전소에 잠입해 입수한 다이나마이트로 고향인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부친의 집에서 수 차례 실험을 거쳐 사제시한폭탄 제조에 성공했다. 이후 세 애국지사들은 부민관에 몰래 잠입해 유지사가 연단 밑에, 강의사와 조의사가 각각 복도와 화장실에 준비한 [[다이너마이트]] [[시한폭탄]]을 설치하고 연설 도중 터뜨려 대회를 무산시켜 버렸는데 이를 '부민관 폭탄 의거'라고 한다. 이로 인하여 '아세아 민족해방'이란 주제로 강연하려던 [[박춘금]]의 계획은 무산되었다. 또 이 사건으로 1명이 폭사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다. 당시 [[조선총독부]]는 이 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. 이 사건의 여파로 [[비밀결사]] 단체였던 대한애국청년당 [[건국동맹]] 등의 정체가 탄로났고 [[건국동맹]]의 주요 간부였던 [[조동호]]가 검거당했으며 광복 후에야 출옥하게 되었다. 그리고 박춘금은 의거의 주역인 유만수 등을 체포하기 위해 직접 사재를 털어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지만 시간은 박춘금과 일제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한 달도 안 되어 [[8.15 광복]]이 찾아왔기 때문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